대구서부산악회 12월 산행기
대구서부산악회 12월 가야산 산행기
대구서부지사 기술과장 최만호
2012년을 마무리하는 12월!!
매월 셋째주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행사에 나서는 대구서부산악회의 정기 산행날이다.
전국의 영산과 명산뿐만 아니라 이름없는 소박한 산도 찾아가는 우리 대구서부산악회는 올들어 가장 추운 이달 산행은 가까운 가야산을 오르기로 했다.
어릴적 우리는 이산을 개야산 이라 불렀다.
아무것도 모르던 초등학교시절이었다.
학교는 가야산 아래에서 시오리 허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학교 밑으로는 들판 가운데를 똑바로 길을 내놓은 마릿들 이라는 들판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되었다.
엄청나게 추운 겨울날 마릿들 길을 올라가자면 가야산에서 내려오는 살풍이 온몸에 베어 들어왔다.
고개를 들어 가야산을 보노라면 살벌한 개야산은 우리를 내려다보는데 악마의 잇빨처럼, 요철같이 생긴 푸른빛의 정상부 형상이 원망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당시에는 변변한 방한복도 없고 외피는 백프로, 내피는 스펀지 한겹이 되어있는 돕바 하나로 목을 움츠리고 두 손은 상의 주머니에 꼭 집어넣고 몸을 뒤로 돌려서 길을 올라가곤 하였다.
왜 그렇게 징하고 정나미 떨어지는 산인지 고개를 절레 흔든다.
자동차나 교통인프라가 거의 없던 시절이어서 내가 사는 동네에서 가끔씩 해인사를 가는 사람은 행정구역상으로 고령군인 마릿들을 지나고 오름실-개수린-서우재를 지나 성주군인 북두림을 거쳐서 경상남도인 가야를 지나야 비로소 해인사로 진입할 수 있다.
그 시절만 하더라도 저렇게 살벌하고 무섭고 정나미 떨어지는 갸야산을 오른다는 건 상상할 수 도 없었다.
다만 그 산아래 미지의 해인사라는 아주 큰절집이 자리하고 있다는 데서 은근한 위로가 되어주고 있었다.
그곳에는 아주 큰 부처님이 모셔져 있고 잿빛 승복을 입은 스님들이 천천히 왔다 갔다 하는걸 떠올려 보면 큰 산 아래에는 큰 절집이 있는가 하고 생각하였다.
세월이 흐르고 나도 나이가 조금씩 들면서 양귀로 들은 바로는, 가야산을 오르는 길은 해인사를 통해서만이 갈수있다, 라고 알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 단일통로는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일명 북두림)에서도 오를 수 있는 길이 생겼다.
다시 말하면 가야산을 오르는 길은 해인사로 오르는 길과 북두림으로 오르는 길 두군데이다.
흐르는 세월과 같이 하면서 반도의 이산저산 올랐어도 이상하게도 나는 가야산을 바라고 가는 일은 없었다.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알수가 없어도, 누군가가 가야산을 오르자면 가까이 있어서 언제나 갈 수 있는 산, 그 옛날 초등시절 겨울이면 하도 고생을 해서 그런지 그다지 정이 가지 않는 산 가야산이었다.
그래서 나는 은근히 부정적으로 말하고 반대를 하면서 가야산에 오르기를 거부하였다.
또 한세월이 흘러 1990년도 초반인가에 학교뒤의 가야산에 처음으로 오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힘들여 정상에 올라서도 큰 감명을 얻지는 못했으며 동네 뒷동산에 오르는 정도의 소감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번 딱아놓은 길이었던가, 이후로는 가끔씩 가야산을 오르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 철마다 멋진 옷을 갈아 입는산, 가야산,
왠통 흰바위만이 있는 신비스런산 가야산,
꿈을 꾸는 듯 편하게 누워 있는산 ,가야산,
볼수록 멋있는 친구 같은산, 가야산,
내가 태어난 곳과 가까이 있는 뒷동산 같은산 ,가야산,
누구에게나 자랑할 수 있는산, 가야산,
이렇게 언제부터 인가도 모르게 나는 가야산 예찬론자가 되어버렸다.
서기 2012년 12월 15일 대구서부 산악회 회원 6명은 금년의 마지막 산행지인 가야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올겨울은 초입부터 동장군이 활개를 치고 나다니는 통에 회원 모두들 기가 죽어 두툼한 방한옷에 각종 장비들 챙기랴 부산을 떤것과는 달리 새벽하늘에서는 부슬부슬 겨울비를 뿌려대고 있었다.
김이 확 빠져버렸다.
그 바람에 몇 회원은 초장부터 겁을 먹고 출발에서 빠지고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고 착한 가야산을 기대하면서 차는 고속도로를 대닫고 있었다.
차가 개수린을 지나고 서우재로 접어들자 하늘은 역시 우리의 바람대로 어느새 비는 없어지고 연한 눈발로 바뀌어 내려주고 있었다.
안도의 숨을 내쉰 우리는 서로서로 마주보고 웃음 지을 수 있었다.
역시 말야 거봐!! 내말이 맞제?
때가 낮이 되면 비가 멋는다 했제?
히야! 오늘 진짜 죽이는 날이다.
막연히 기분이 들떠진다.
백운리 공원관리소에 도착하니 직원들이 먼저 산을 오르며 등산로에 흙을 뿌려대고 있었다.
농담으로 “정상에서 라면을 끓여 먹어야 하는데 어디가 좋은 장소인가요?”
직원에게 물으니 “ 국립공원 전 지역에 취사 금지구역 이며 우리 직원들이 요소요소에서 단속합니다.” 한다
참으로 재미없는 분, 어떻게 저렇게 말눈치가 없을까?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찌저리 곧은 말만 하고 살려할까?
사이사이에 살과 뼈를 골고루 씹어가면서 밥도 먹고, 죽도 먹고, 고기도 먹고, 술도 먹고 해야 살맛이 나듯이 말 또한 재치있게 말하고 답하는 길이 아주 많은데도 저리도 말재간이 없으니...
가까운 곳이라 우리가 일찍 와서 그런지, 성내엔 비가와서 그런지 산행하는 사람도 몇 안되고 특히 눈덮인 산길을 걷는 첫발자국 이런건 처음 이었으며 참으로 설레임 가득안고 내딛는 걸음걸음 이었다.
그다지 부지런 하지도 못한 내가 어릴적 들판에서 연을 날리며 뛰어 다닐땐 하얀 겨울논바닥 위로 강아지 보다 내가먼저 길을 낸 적은 있었지만 그 많은 등산길에 내가 첫발자욱으로 길을 낸다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신기한지..
우리 일행은 그저 감격해 할뿐이었다.
세상에서 좋은말만 다하다가 어느듯 서성재에 올랐다.
하늘도 즐겁게 기뻐한 우리를 알아봤는지 파란 색깔을 만들며 개이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바위오름길이다.
걷옷을 벗어 배낭에 걸처메고 정신없이 오르기를 한동안, 앞서가던 한 회원이 갑자기 괴성을 질렀다.
깜짝놀라 위를 보는데 빨리 올라오라고 손짓이 요란하다.
널따란 망대같이 생긴 바위에 올라선 우리는 넋이 나간채로 앞을 보고만 있었다.
커다란 운무때가 건너편에 솟아있는 남산 제일봉이랑 저 멀리 떠있는 듯이 올라와 있는 미녀봉이며 오도산 봉우리들을 가렸다 말았다 반복하며 지나가는 중이었다.
옛날 신선들이 저런 광경들을 시로 읇고 노래하였던가?
조선 대가 김홍도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하얀 구름들은 꼬리가 열두 개나 달린 용이 춤을 추듯이 우리들의 눈아래 에서 놀고 있었다.
나 또한 산아래 펼쳐저 있는 운해에서 덩달아 헤엄치는 중이다.
문득 생각이 나서 사진을 찍어보았지만 창에 들어오는 건 일부분일 뿐이었다.
그래도 이게 어딘데 하면서 우리는 연신 셔터를 눌러댄다.
칠불봉에 올랐다.
능선 건너편에서 모진 삭풍이 불어 넘어와 볼을 때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 현실로 돌아왔다.
한줄기 한기가 온몸을 뒤덥는다.
부랴부랴 걷옷을 꺼내입고 귀마개를 끼고 부산을 떨었다.
다시 건너편 우도봉에 올라섰다.
저 산아래 해인사는 구름에 갇혀 보이질 않는다.
스님들은 커다란 목탁을 부지런히 두드리며 득도를 향해 중생구제를 위해 목하 정진중일 것이다.
나도 중얼거려본다.
올 한해 탈없이 보살펴 주신 신령님께 감사드리며, 내년 또한 올해 만큼만 되게 하여 주소서!
2012년 12월 대구서부산악회의 마지막 행사는 이렇게 마무리 되어가고 있었다.